요시토모 나라의 요시모토 나라의 일러는 부자연스러움 속에 자연스러움이 있다. 미술이나 예술쪽은 잘 모르지만, 요시모토 나라의 일러들은 쉽게 질리지도 않고, 자꾸 바라보게 되는 매력이 있다고나 할까?
오랜만에 두 명의 친구를 보기로 하였다. 왠지 둘다 늦을 거 같은 예감에 약속 장소를 반디로 옮겼는데, 예감이 적중하였다. 가끔 미래를 내다보는 일을 종종 경험하는데, 내가 경험하는 미래는 항상 안 좋은 쪽으로만 일어난다. 이번에도 역시나... 둘다 동시에 한시간이나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30분 정도는 여유있게 기다릴 수 있지라는 생각과 내 눈에 앞에 놓인 익숙한 요시의 일러가 내 인내심을 쭈욱 잡아당겨놨다. 물론 이 책을 다 읽고나서도 한참이나 기다릴 정도로 나타나지 않았을 때의 내 안의 인내심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지만... ㅎㅎ 내 인내력의 한계는 30분이라구~!
이 책의 대충의 줄거리는 내가 쓰고 싶지만 인터파크의 줄거리를 빌린다. 귀찮아~!
인터파크 책소개
요시모토 바나나의 최신작 이 시대에 가장 사랑받는 작가 중의 한 사람인 요시모토 바나나의 신작 『아르헨티나 할머니』가 민음사에서 출간되었다. 어머니를 잃고 슬픔에 잠긴 소녀가 아르헨티나 할머니라는 수수께끼의 여인을 만나 상처를 치유하는 과정을 특유의 동화적인 색채와 섬세한 문체로 그려냈다. 여기에 세계적으로 각광받는 일러스트레이터 요시토모 나라가 이 작품을 위해 표지화를 포함한 15점의 회화를 그려 특별함을 더했다.
상처와 치유, 상실과 따뜻한 희망을 이야기하는 감동의 소설 요시모토 바나나는 『키친』 이후 줄곧 상실에서 오는 상처와 그 상처에서 오는 슬픔을 이겨 내는 따뜻한 사랑을 이야기하며 위로가 필요한 이 시대의 독자들에게 끊임없이 손을 내밀어 준다. 그녀는 “우리 삶에 조금이라도 구원이 되어 준다면, 그것이 좋은 문학”이라고 말한다. 이번 작품에는 상처를 치유하는 모성의 상징으로 아르헨티나 할머니가 등장한다. 아르헨티나 할머니는 동네 어귀 다 무너져 가는 건물에 혼자 사는 괴짜 여인이다. 한때는 탱고나 스페인어를 가르쳤지만 머리가 이상해졌다는 소문이 돌면서 아이들의 놀림감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아르헨티나 할머니라는 수수께끼의 여인 주인공 미쓰코는 엄마의 몸에서 혼이 떠나는 모습을 지켜본다. 매일 병문안을 오던 아버지는 그날따라 병원에 나타나지 않았다. 하지만 미쓰코는 원망하거나 슬픔에 잠기는 대신 엄마에게서 ‘커다란 선물’을 받았다고 생각하기로 한다. 반년 후 아버지가 아르헨티나 할머니와 동거에 들어가자 미쓰코는 큰 충격을 받는다. 용기를 내어 아르헨티나 빌딩이라고 불리는 그녀의 집으로 찾아가 보니, 아버지는 그 집 옥상에서 타일로 만다라를 만들고 있었다. 그 만다라를 통해 아버지는 아내와 사별하고 평생을 몸담은 석공 일에서도 밀려난 아픔을 달래고 있었다. 미쓰코도 차차 아르헨티나 할머니의 집에드나들기 시작한다. 왜냐하면 그곳에서는 눈물이 번질 때까지 마음껏 추억을 떠올릴 수도 있고, 공상에 젖어 있다가 애처롭게 깨어나서도 혼자가 아닐 수 있었기 때문이다. 고양이 털과 먼지와 악취가 가득한 그 집은 추억을 되살려 주는 곳이자 모든 사람들을 화합하게 해 주는 곳이었다. 아르헨티나 할머니가 작은 사내아이 하나를 낳고 심장 발작으로 갑자기 세상을 떠난 후, 아버지는 혼자 아르헨티나 빌딩에 남아 아이를 기른다. 미쓰코는 이 모든 일을 지켜본다. 참아 내야 하는 그 무엇도 아니기에 자연의 변화처럼 그렇게 자연스럽게 변화를 받아들인다. 그러다가 그 과정 속에 그녀 또한 녹아든다. 하지만 오후의 정적 속에서 똑딱거리는 시계 소리처럼 추억은 그렇게 선명하다.
동명 영화로 제작되어 화제를 모은 작품 「아르헨티나 할머니」의 동명 영화가 제작되어 일본에서 3월 24일 개봉을 앞두고 있다. 「쉘위댄스」의 야쿠쇼 코지가 아버지로, 「세상의 중심에서 사랑을 외치다」의 호리키타 마키가 미쓰코로 나온다.
만다라라던지, 인생의 모자이크 등... 이 책을 읽으면 떠올릴만한 글귀가 여럿 있지만, 나한테는 두 가지 글귀가 맘에 들었다.
그리움이란 모든 것이 달라진 후에야 비로소 싹트는 것.
사랑은 보고 또 봐도 얼굴을 기억할 수 없을 때.
그리움, 사랑 둘다 정의 하기엔 너무 어렵지만, 상실이나 이별의 아픔을 겪어야 비로소 그리움이란 단어가 절실해질 것이고, 사랑은 봐도 봐도 기억이 나지 않는 얼굴을 다시금 보고 싶어지는 것이기에 위의 두 글귀는 어느 정도 정의를 내려주지 않나 본다.
지금 혁명이 진행 중이다. 그 혁명과 더불어 일어나는 문명은 우리가 알고 있던 부에 관한 모든 사실에 도전을 가할 것이다. ... 미래의 부를 좌우할 수 있는 '심층기반(deep fundamentals)'으로 말이다. ... 혁명적인 부와 가장 직접적인 연관성을 갖는 몇몇 심층 기반은 전혀 주목을 받지 못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 낯선 미지의 영역으로 들어가 가장 빠르게 변화하고 있으며 가장 강력하고 매혹적인 3가지의 심층기반을 탐험할 것이다.
3가지 심층 기반은
첫째, 시간의 재정렬(Rearranging time) 둘째, 공간의 확장(Stretching space) 셋째, 지식에 대한 신뢰(Trusting knowledge)
(Y=Wealth Mechanism, X= 시간, 공간, 지식의 대변화'로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3. 시간은 부의 창출과 어떤 의미
어느 곳에서든 산업시대의 조직을 대체하거나 혁신하려는 시도들은 기존 조직의 수혜자와 그 지지자들로부터 저항을 야기한다. 이 저항은 변화의 속도를 불규칙하게 만들기도 하고, 적어도 그에 영향을 미친다. 주요 기관들이 지식경제가 요구하는 가속도에 동시화되기 못하고 기능 장애를 일으키는 이유가 이것 때문이다. 이처럼 오늘날의 정부는 시간을 제대로 다루지 못해 생겨나는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다.
가정, 회사, 산업, 국가 경제, 글로벌 시스템 등 그 모든 면에서 시간이라는 심층 기반과 부 창출 사이의 관계가 그 어느 때보다 전면적인 변화에 휩싸여 있다는 것이다.
우리의 핵심 조직들은 서로 동시적이지 못하고, 동시화와 비동시화 사이의 긴장이 증가하고, 가속화가 지속되며, 시간은 불규칙해지고, 시간과 생산성의 연결 고리가 약해지는 반면 시간의 간격은 갈수록 잠재 가치가 늘?! 爭ぐ? 있다. 인간은 시간을 점점 짧게 또는 점점 길게 측량하고 탐구하고 통제할 수 있다. 이 모든 면을 고려할 때 역사적인 대 변환이 진행 중이라는 사실은 분명해진다. 부의 심층 기반인 시간과 인간의 관계가 혁명적으로 바뀌고 있다. 이 정도로도 우리의 삶과 다음 세대의 삶이 변화할 것??. 그러나 이것으로 끝이 아니다.
#4. 공간은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가?
우리는 이처럼 세계 지도상에서 부와 부 창출의 중심이 바뀌는 현실을 목격하고 있다. 처음 경제적인 파워가 중국에서 서양, 유럽으로 이전했을 때 이미 부의 순환은 시작되었다. 그 힘은 미국으로 이동했다가 수세기 전에 경제 강자의 자리를 내준 아시아로 다시 돌아가고 있다. 역사의 거대한 순환이 완성되고 있는 것이다. 외교협회의 로버트 매닝은 '2050년의 세계를 생각해 보라. 세계 인구의 절반 이상, 세계 경제의 약 40퍼센트, 세계 정보 기술산업의 절반 이상, 세계 수준의 첨단 군사력이 아시아에 있을 것이다'라고 말하기고 했다.
경제적인 재세계화의 진보는 앞으로 수년 내에 자연스럽게 지지부진해지거나 걸음을 멈출 것. 반세계화 운동가들조차 유감스러워할 만큼 공간적인 범위의 확장을 정지시킬 수 있는 강력한 요소들이 등장
. 부의 장소에 있어서 다른 변화가 발생하지 않더라도, 즉 아시아로 부의 위치가 이동하지 않고, 지역 국가를 형성하지 않으며, 고부가가치 장소를 탐색하지 않더라도, 또는 세계 경제를 재세계화하고 탈세계화하지 않더라도 지구가 아닌 다른 공간으로 도약하는 것만으로 부의 창출 면에서 혁명적인 전환이 기록될 것이다. 이 증거는 압도적이다. (우주 개발의 본격화를 예상)
#5. 지식은 어떤 의미 폭발적인 외부 저장소와 60억 인간의 두뇌 지식을 합해야만 인간의 지식 공급 총량을 알 수 있으며, 이를 '총지식 공급량'이라고 부를 수 있다. 이것은 혁명적 부를 창출해 낼 수 있는 막대한 원천이다.
결과적으로 지식 경제 전문가 사이에서도 소수만이 '변화의 가속화에 따라 무용지식의 축적 속도도 그만큼 빨라진다'는 무용지식의 법칙에 대해 생각해 보았을 뿐이다. 우리는 과거의 조상들이 느리?! ? 변화는 사회에서 가졌던 부담보다도 휠씬 더 큰 무용지식이라는 부담을 안고 가야 한다. 지금 현재 우리가 소중히 여기는 아이디어도 후세대에게는 웃음거리가 될 수 있다.